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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지에서 잊힌 1만 3천 명의 영웅들: 북파공작원의 가혹한 잔혹사와 남겨진 과제
드라마 '김부장'의 흥행으로 과거 남북 대치 상황 속에서 적군 생포, 첩보 수집 등 비밀 임무를 수행했던 북파공작원(특수임무수행자)들의 비극적인 삶이 재조명되고 있습니다. 1948년부터 1972년까지 약 1만 3천 명의 청년들이 존재 자체가 기밀인 음지로 보내졌으며 이 중 7,726명이 실종되었습니다. 대다수가 평범한 민간인 청년이었으나 국가의 기망으로 외부와 완전히 격리된 채 인간 병기화를 위한 가혹한 고문과 구타 훈련을 견뎌야 했습니다. 이들은 사회 복귀 후에도 정신적·육체적 고통과 사회적 편견에 시달리고 있으나, 여전히 참전유공자 수당 지급 대상에서 제외되는 등 합당한 명예 회복과 보상이 미흡하여 법안 개정 등 실질적인 대책 마련이 시급한 실정입니다.

1. 헌법 바깥에 묻힌 존재들: 국가의 필요에 의해 지워진 청춘의 기록
최근 대중문화계에서 특수 임무 수행자들의 처절한 삶을 다룬 드라마 '김부장'이 뜨거운 반향을 일으키며, 그동안 대한민국 현대사의 가장 어두운 장막 뒤에 가려져 있던 북파공작원의 잔혹한 실체가 마침내 세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분단과 전쟁, 그리고 이어진 이념적 대립의 시대 속에서 이들은 국가라는 거대한 권력에 의해 존재 자체가 기밀로 분류되었던 지워진 인간들이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인 1948년부터 남북 간의 화해 기류가 처음으로 싹트던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 발표 시점까지, 정보기관과 군의 엄밀한 지휘 아래 북한 지역으로 투입된 인원은 무려 1만 3천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들은 적진 한복판에 홀로 침투하여 주요 요인 사살, 적군 생포, 군사 기지 파괴 및 기밀 첩보 수집 등 목숨을 담보로 한 비정규전 임무를 수행했다. 하지만 그들의 헌신에 돌아온 것은 영예로운 훈장이 아닌 철저한 소외였다. 기록에 따르면 투입된 인원 중 절반을 훌수록 넘어서는 7,726명이 차가운 북녘땅에서 실종 처리되어 끝내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국가로부터 유령 취급을 받아야 했던 이들의 삶은 헌법이 보장하는 인간의 기본권과 존엄성마저 완벽하게 박탈당한 채 음지에 묻혀 있었다.
2. 국가가 자행한 기망의 덫: 평범한 민간인 청년들을 겨눈 인간 병기화 훈련
우리가 오랜 세월 동안 품어왔던 가장 대표적인 오해 중 하나는 북파공작원들이 흉악한 범죄자나 사형수들로 구성되었을 것이라는 편견이다. 그러나 특수임무수행자유족동지회 하태준 회장의 생생한 증언에 따르면, 이는 철저히 왜곡된 사실이다. 전체 공작원 중 범죄 경력자는 극소수인 수십 명에 불과했으며, 대다수의 구성원은 당장 내일의 생계를 걱정해야 했던 가난하고 평범한 민간인 청년들이었다. 정부 기관은 "국가를 위해 평생 일할 자리를 주겠다", "안정적인 먹고살 길을 열어주겠다"는 달콤한 거짓말로 청년들을 현혹했고, 정작 그들이 최전선에서 사선을 넘나드는 특수 공작에 투입된다는 진실은 철저히 은폐했다. 하 회장이 이를 두고 "국가가 국민을 상대로 사기를 친 것"이라고 강한 어조로 비판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간단한 체력 측정을 한다는 구실로 이끌려 간 곳은 사회와 완벽히 단절된 격리 훈련소였다. 입소와 동시에 가족과의 연락은 전면 차단되었으며, 자식이 하루아침에 말도 없이 실종된 가정들은 가정이 풍비박산 나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지옥 같은 훈련소 안에서 청년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생존을 빙자한 무자비한 구타와 고문 훈련이었다. 적에게 체포되었을 때를 대비한다는 명목하에 해머로 가슴을 타격하는 등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혹독한 가혹행위가 일상적으로 자행되었으며, 이 끔찍한 과정 속에서 수많은 부대원이 정식 임무를 수행하기도 전에 목숨을 잃거나 평생 치유하기 힘든 지체 장애를 안고 살아가게 되었다.
3. 감시와 차단 속의 유령 생활: 삶과 죽음마저 가로막은 철저한 격리 체제
훈련소와 작전 현장에서의 생활은 철저하게 통제된 감옥과 다름없었다. 공작원 한 명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기 위해 무려 네 명의 교관과 보안 요원이 그림자처럼 밀착 마크하는 엄격한 인간 감시 체제가 가동되었다. 이러한 극단적 정보 차단 속에서 공작원들은 외부 세계의 변화는 물론, 자신을 낳아준 부모형제의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철저한 고립 상태에 놓였다. 감시 요원들은 공작원의 가족이 사망했다는 비보를 접하더라도 작전에 방해가 된다는 심리적 이유를 들어 이를 의도적으로 은폐하고 전달하지 않았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공작원이 임무 수행 중 장렬히 전사하거나 행방불명되더라도 국가 기관은 유가족들에게 전사 통지서 한 장 발송하지 않았다. 가족들은 자식이 왜 사라졌는지, 어디서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한 채 평생을 피눈물로 지새워야 했다. 한 인간의 삶과 죽음, 그리고 가장 기본적인 천륜마저 국가 안보라는 거대 담론의 제물로 삼아 철저히 분쇄해 버린 비인도적 국가 권력의 민낯이 아닐 수 없다.
4. 차가운 사회의 시선과 내면의 살기: 파탄 난 가정이 마주한 잔인한 현실
사선을 넘나들던 공작원들이 계약 기간을 채우고 천신만고 끝에 다시 사회로 방출되었을 때,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현실은 결코 따뜻한 환대가 아니었다. 오랜 시간 지옥 같은 구타와 인간 병기화 교육에 노출되었던 이들의 정신과 육체는 이미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처참하게 피폐해져 있었다. 하태준 회장이 사회로 복귀했을 당시, 오랜만에 재회한 가족들이 그의 눈빛을 보며 "눈에 살기가 가득하다"며 두려워했던 일화는 이들이 겪은 심리적 트라우마가 얼마나 깊고 파괴적이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갑작스러운 실종과 의문투성이의 귀환은 남겨진 가족들과의 깊은 감정적 골과 오해를 낳았고, 이는 또 다른 가정 붕괴의 도화선이 되었다. 귀환한 공작원들 중에는 가족들의 차가운 원망과 불신을 견디지 못하고 알코올 중독에 빠지거나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채 부랑자가 되는 이들이 속출했다. 오랜 공작 생활 끝에 살아 돌아온 아들을 보고 너무나 놀란 나머지 심장마비로 급사한 어느 어머니의 비극적인 일화처럼, 국가가 방치한 상처는 공작원 개인을 넘어 유가족들의 삶까지 통째로 짓밟아 버렸다.
5. 영예로운 명예 회복을 향하여: 미흡한 특별법과 제도적 수당 지급의 시급성
수십 년간 역사 속에 봉인되어 있던 북파공작원의 존재는 지난 2002년 법원의 역사적인 존재 인정 판결과 2004년 국회를 통과한 '특수임무수행자 보상에 관한 특별법' 제정을 통해 비로소 대한민국 역사의 수면 위로 엄숙히 부상했다. 국가가 마침내 자신들의 과오를 인정하고 이들의 희생을 공론화한 것이다. 그러나 법 제정 이후 20년이 흐른 현재까지도 생존해 있는 유공자들과 가슴에 한을 품고 살아가는 유족들이 체감하는 실질적 보상과 명예 회복은 턱없이 부족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
현재 특수임무유공자들은 일반 참전유공자나 여타 국가유공자들이 매월 안정적으로 지급받는 정기적인 보훈 수당 대상에서 철저히 배제되어 있다. 이들에게 제공되는 혜택은 고작 일부 의료비 지원이나 보훈병원 이용 시 감면 혜택 같은 현물 위주의 단편적인 복지에 그치고 있다. 지난해 이들에게 합당한 '명예 수당'을 매월 정기적으로 지급하도록 하는 법안이 국회에 발의되었으나, 여전히 정치권의 무관심 속에 소관 상임위원회에 계류되어 먼지만 쌓여가고 있다. 국가를 위해 목숨을 초개와 같이 바친 영웅들이 이제는 고령의 나이로 하나둘 세상을 떠나고 있는 만큼, 이들의 공로를 독립유공자 수준으로 격상하고 합당한 예우와 지원 정책을 실현하기 위한 입법적 결단이 단 1분 1초도 지체되어선 안 된다.